외부 우려ㆍ비판 딛고 출연硏 새 모델 제시

세계 최고 연구소 8곳과 MOU···기술 혁신 가속

 

지난 1월 '미래발전전략 발표회' 당시 모인 이태식 원장과 전문연구소장들, 그리고 외빈들 기념촬영 모습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연구원 내 전문연구소 실험’을 핵심으로 한 미래 발전전략을 공개한 지난 1월15일. 경기 일산의 연구원 내 강당을 메운 외부 전문가들의 반응은 물음표 일색이었다. 1983년 개원 이후 30년 이상 지속된 학제별 연구조직의 틀을 깨는 실험.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들여온 ‘문익점 프로젝트’란 타이틀 아래 10개 전문연구소마다 전체 건설연 덩치의 10배가 넘는 세계 수위급 연구소들을 타겟으로 정해 MOU를 체결하고 그 노하우를 흡수해 이들을 능가한다는 청사진에 쓴웃음까지 새어나왔다.

　예상대로 쓴소리가 쏟아졌다. “벤치마킹하려는 해외 연구소의 규모와 성격이 건설과 맞느냐, 한번이라도 찾아가 보긴 했나”, “목표만 있고 인력ㆍ예산 분석이 없다. 협약 체결만 해도 최소 대여섯번 방문해야 할 텐데, 예산과 인력은 정부로부터 승인받았나”, “원장 임기가 끝나면 끝나는 것 아니냐”, “모두 다 하겠다고 하면 민간연구소는 뭐 먹고 사는가, 본연의 업무가 소홀해지는 것 아니냐”ㆍㆍㆍ.

　당연한 반응이었다. 10대 전문연구소 중 구심점 격인 창의전략연구소가 벤치마킹하겠다고 공언한 독일의 프라운호퍼(Fraunhofer)만 해도 연간 19억유로(한화 약 2조7710억원)의 예산을 쓰고 연구인력만 건설연 전체의 20배가 넘는 2만2000명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벤치마크인 독일의 헬름홀츠(Helmholtz)도 3만6000명 직원이 일하는 독일의 간판급 연구소다. 반면 MOU를 맺어 그 노하우를 흡수함으로써 이를 추월하겠다는 창의전략연구소의 인력은 31명, 할당된 연간 예산은 12억2000만원이 전부였다.

　나머지 9개 전문연구소도 오십보백보 수준. 화재안전연구소가 벤치마킹할 호주 연방과학원(CSIRO)의 인력은 건설연 전체와 맞먹는 1000여명. 환경ㆍ플랜트연구소의 타겟기관인 스웨덴의 SP국립시험연구소의 인원은 6500여명이다. 수자원ㆍ하천연구소가 타겟으로 정한 네덜란드 델타레스(Deltares)의 연간 예산도 1억유로(1250여억원)다. 게다가 창의전략연구소와 구조융합연구소가 프라운호퍼를 동시에 찍는 등 10개 전문연구소끼리 벤치마킹 기관마저 겹쳤다.

　발표회장의 맨 앞자리에서 경청하던 이태식 원장의 ‘연내 MOU 체결 계획은 너무 느리다. 상반기 중에 끝내라’는 주문이 곁들여지면서 ‘임직원들, 3년간 무지 힘들겠구나’란 동정심마저 일었다. 게다가 30여년 만에 최초로 부서장 공모제를 통해 불과 열흘여 전에 임명된 연구소장들이 뚝딱 만든 실천계획들도 아직 거칠었다. 새 원장의 3년 임기간 ‘보여주기식 쇼’로 끝날 듯 했다. 당장 임박한 MOU 체결 건만 해도 해외 간판급 연구소들이 굳이 건설연의 산하 전문연구소와 협약할 유인이 별로 없어 보인 탓이다.

　그로부터 한달여가 지난 후부터 한국건설기술연구원발 ‘스팸성 보도자료 고문(?)’이 시작됐다. ‘제발 MOU 체결했다는 보도자료는 그만 뿌려라’는 기자들의 컴플레인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자료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영국 BRE, 미국 CII, 스웨덴 VTI, 네덜란드 TNO, 노르웨이 NGI, 핀란드 VTT, 네덜란드 델타레스 등 파트너들이 쟁쟁하다. 또 다른 공통분모는 전략 발표회 때 거론된 바로 그 벤치마킹 기관들이란 점이었다.

 

지난 3월 첫 업무협약을 체결한 영국 BRE와의 서명 모습

　발표회가 끝난 후 11개월이 지난 지금. 10개 전문연구소 중 8곳이 해당 분야의 세계 최고 연구소들과 MOU를 맺고 공동 연구작업을 진행 중이다. 통상적으로 MOU라고 하면 대외 홍보용의 일회성 세리모니에 그치기 마련이지만 건설연은 달랐다.

   지난 3월 최초의 전문연구소 단위 협약 파트너인 영국 BRE만 해도 11월 성과공유 세미나까지 끊임없이 교류했고 현재 전 세계적 고민거리인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건물 에너지 소비량 감축 목표의 ‘그린 리모델링 기술개발’ 등을 함께 수행 중이다. 건축도시연구소는 내년 초 두바이 정부와 ‘한국형 제로에너지 하우스’ 수출계약까지 앞뒀다.

 

지난 9월 두바이정부와의 제로에너지건축 협약 모습

   이태식 원장을 구심점으로 한 건설연의 궁극적 지향점은 좁은 국토의 한계를 뛰어넘을 ‘건설 한류’ 바람과 해묵은 건설산업의 울타리를 넘어설 융ㆍ복합 바람으로 요약된다. 지난 11월4일 건설연 역사상 가장 많은 수십명의 개발도상국 장ㆍ차관들이 운집한 간담회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세계 각국에서 최고의 VIP 고객으로 대우받는 장ㆍ차관들은 좁디좁은 건설연 회의실에 불편하게 모였고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가장 빨리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 기적을 일궈낸 한국의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이태식 원장의 발언에 분위기는 일변했다.

11월 개도국 장관 초청 간담회 직후 성사된 마다가스카르 건설부 장관과의 양해각서 체결 모습

　유럽 선진국들과 협약하면 기술만 얻지만 우리 한국과 제휴하면 기술뿐 아니라 20세기 최고의 성공모델로 꼽히는 최신 경제개발 경험을 전수하겠다는 제안. 마다가스카르의 건설 장관이 즉석에서 MOU 체결을 요청하면서 곧바로 조인식을 가졌다. 에티오피아와 파라과이의 장관도 귀국 후 곧바로 MOU 협약요청서를 보냈다.

　지난 11월26일에는 베트남 건설부와의 앞선 협약을 계기로 한국의 기술 강소기업 28곳의 46개 기술을 베트남 현지에서 소개하는 설명회도 가졌다. 내년 본격화될 ‘EU Horizon 2020 프로젝트’에는 국내 정부 출연연구소로는 사상 처음 동참해 아시아 최초의 지열발전 실증연구, 세계 최고의 X-ray 단층촬영(CT) 분석기술을 완성시킬 계획이다. 내년 1월에는 쿠웨이트의 공공시설 전반에 계획ㆍ설계부터 완공 후 유지관리에 이르는 생애주기상 필요한 기술들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옵셋 프로그램’ 계약도 예정됐다.

　건설연의 파격적 실험은 진행형이다. 10대 연구소장들은 건설기술을 획기적으로 바꿀 ‘Big Engineering’과 첨단과학·건설·상상력이 결합된‘Flagship R&D’ 등의 새로운 발상과 실천을 서서히 즐기기 시작했다. 향후 10년간 대한민국 건설은 물론 국가를 이끌어갈 대형 융·복합, 미래전략 기술 개발에 재미를 붙였고 속도도 과거와 달라졌다.

　이태식 원장은 “기존의 ‘추격형 R&D’로는 남을 따라갈 뿐, 건설기술과 세상을 선도하기 어렵다. 이제는 선도형 연구로 체질을 바꿔 글로벌 무대에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라며 “어렵게 개발해봤자, 쓰이지 않는 기술은 무용지물이다. 우리가 가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팔아야 하고 팔기 힘든 기술이라면 아예 연구 자체를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 말 공신인 문익점이 한국 의류문화의 패러다임을 삼베에서 무명 중심으로 바꿔 국민들의 생활의 질을 뒤바꾼 것처럼 건설연의 ‘문익점 프로젝트’가 관행에 젖은 국책연구기관들의 혁명적 쇄신과 이를 계기로 한 한국 건설기술의 세계 최고 도약과 국민 삶의 질 혁명을 선도하길 기대해보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김국진기자 ji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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